책소개
『중국학 개론』은 [국학 개론(國學槪論)]을 완역한 책이다. 이 책은 청말(淸末)과 민초(民初)의 저명한 학자 장타이옌의 강연록으로, 1922년 4월에서 6월까지 장타이옌이 상하이에서 개최한 국학 강연을 당시 청강자였던 차오쥐런(曹聚仁)이 채록해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모두 열 차례의 강연을 수록하였고, ‘개론(槪論)’, ‘경학’, ‘철학’, ‘문학’, ‘국학의 진보’ 등 다섯 개 분야로 이루어졌다.
저자소개
저자 장타이옌 (章太炎, 1869∼1936)의 본명은 장빙린(章炳麟)이고 자(字)는 메이수(枚叔)며 타이옌(太炎)은 호(號)다. 그는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위항(余杭) 출신으로 민국 초기의 민주 혁명가며 사상가이자 저명한 국학사(國學史) 연구자다. 그의 연구 분야는 소학(小學)과 역사, 철학, 정치 등으로, 이에 대한 다수의 저술이 있다. 장타이옌은 조부의 반청(反淸) 반만(反滿)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22세에 항저우에 있는 고경정사에 입학해 유가 경전과 제자백가를 수학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캉유웨이·량치차오와 서신으로 교류했고, 1897년 상하이에서 ≪시무보≫ 주편(主編)을 맡으면서 유신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0년에 변발을 자르고 혁명의 뜻을 세웠다. 1903년 [캉유웨이가 논한 혁명을 반박하는 글]이란 글과 쩌우룽(鄒容)의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을 썼다가 청조(淸朝)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장타이옌은 1906년에 출옥해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과 함께 동맹회(同盟會)에 참여해 ≪민보≫를 편집하고 집필했다. 장타이옌은 신해혁명 뒤인 1912년 상하이 쑨원 총통부의 추밀고문(樞密顧問)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자 그에 대한 토벌 운동을 주장하다 가택에 연금(軟禁)되기도 했다. 그는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자 연금에서 풀려났고, 이듬해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새로 수립한 혁명 정부에 가담했지만 결국 의견의 차이와 건강상의 이유로 국민당을 탈당하게 되고, 1918년 이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정계 은퇴 이후 장타이옌은 학문 연구와 강학 활동에 전념하면서 만년에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칭호를 얻으며 강학을 통해 항일과 애국적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장타이옌의 학문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다양한 시도와 변모를 모색했다. 그는 초기에 서방의 기계적인 유물론과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서 서양의 철학과 사회학, 자연과학 등의 신(新)사상을 대변하며 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인 ≪구서≫에서 숙명론과 천명론을 부정했고, 또한 불교의 유식종(唯識宗)과 서방의 근대 유심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실패 이후에 그의 사상은 점차 침체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루쉰이 장타이옌을 소개할 때 첫째로 혁명가고 둘째로 대학자로 언급한 점이 이를 대변한다. 장타이옌은 비록 국수(國粹)를 주장했지만 모든 권위와 구속을 반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강렬한 도덕주의자로서 도덕의 역량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에 대한 사회적 폭압을 반대하며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옹호하기도 했다. 장타이옌은 문학, 역사학, 언어학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고 그의 혁명적인 문장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그의 문언체 문장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신방언(新方言)≫과 ≪문시(文始)≫, ≪소학 답문(小學答問)≫ 등의 내용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의 저술로는 ≪장씨 총서(章氏叢書)≫(1915), ≪장씨 총서 속편(章氏叢書續編≫(1933), ≪장씨 총서 삼편(章氏叢書三編)≫(1939), ≪장타이옌 전집(章太炎全集)≫(199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