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
아사히신문사 기자라는 안정된 직업을 내려놓고(『퇴사하겠습니다』), 월급과 전기 없이도 생활할 수 있게 스스로를 다지고(『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냉장고 없이도 맛있고 건강한 밥상을 만드는 훈련을 하면서(『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인생을 헤쳐 온 이나가키 에미코의 신작 에세이. 이번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물론 프랑스어 따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프랑스 리옹에서 우당탕탕 ‘자취 생활’을 시도해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생의 가능성을 넓히고, 인생을 유연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힌트가 가득한, 이나가키 에미코 생활 철학의 결정판!
“평소에 하지 않던 것을, 여행을 갔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리옹에서도 도쿄의 내 동네, 내 집에서처럼 ‘평소의 생활’을 한다.
그게 이번 여행의 목표다.”
‘엉뚱하지만 이유 있는 생각, 그리고 과감한 실행.’ 그것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아사히신문사 퇴사를 감행하고 현재까지 ‘개인적 차원의 탈원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미니멀리스트, 이나가키 에미코를 대표할 만한 표현이다. 도쿄의 한 작은 동네에서, 회사원은 아니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인으로서,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생활 반경을 2주 동안 프랑스 리옹으로 넓혀보기로 한다. 우연한 기회에 선택된 외국의 한 동네에서 자신의 ‘생활’을 평소처럼 이어갈 수 있다면, 인생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릴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끄럼 많은 미니멀리스트의 ‘프랑스 자취 생활’이 시작된다. 도쿄에 있을 때도 박물관에는 가지 않기에, 프랑스에 갔다고 해서 별안간 박물관을 찾지는 않는다. 도쿄에서처럼 이번 여행의 관심은 오로지 ‘생활’이다. 카페이고, 시장이고, 사람이고, 무엇보다 ‘나’이다.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긴 했지만, 여행은 여행. 그것도 코로나 상황 이전이었으니까 가능했던 무려 ‘해외여행’이다. 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고 시내를 향할 때의 설렘이라든지, 낯선 나라의 낯선 숙소를 찾아갈 때의 긴장감이라든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의 두려움이라든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투어에 참여할 때의 어색함이라든지, 경험해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이제 와 생각하니 너무나 특별했던 일상적인 감정들이 글 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다만 다른 여행기와 다른 점을 꼽자면 이 여행기는 너무나 ‘실험적’이라는 것, 이런 여행을 결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무런 준비가 없는 무모한 여행이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잘 짜인 패키지여행처럼 계획대로만 산다는 건, 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니까.
“생활의 핵심은 카페와 시장, 그리고 사람.”
“카페의 단골이 된다. 장은 시장에서 보고 밥은 직접 해 먹는다.”
이 무미건조한 일을 굳이 프랑스 리옹까지 가서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해외여행이란 게 근사해 보이는 데 비해 힘든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어딘가로 밀려나 사라져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단골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 같은, 내 나라에 있을 땐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일이,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지상 최대의 난제가 되어버린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잘 안 되는 것투성이다.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여행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나의 뿌리 같은 게 보인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취사가 가능한 곳, 오래된 주택가, 근처에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만 세우고 달랑 숙소만 예약한 뒤 훌쩍 떠난 여행길, 이나가키 에미코 역시 무척이나 허우적댔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영어를 쓰지 않는다는 콧대 높은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게다가 관광지도 아니고 주택가에, 말도 할 줄 모르는 ‘동양인 아프로헤어’가 느닷없이 등장했으니. 자본주의 미소에 ‘봉주르’ ‘메르씨’를 더해 프랑스 카페의 단골이 되어보겠노라는 야심찬 계획이 실현되기는커녕, 우리의 여행 생활자는 냉담하기 그지없는 점원들의 응대에 나날이 기가 죽어간다. 단골손님들과 수다를 떠느라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장 상인들의 태도에 기가 꺾여, 현지인들과의 소통은커녕 손가락으로 가리켜 겨우 먹을 것을 사는 형편이다. 자신에게 웃어주는 사람은 “예쁘다”며 따라오는 정체 모를 남자뿐이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지할아버지뿐이다. 프랑스 리옹에는 이나가키 에미코가 ‘설 자리’가 없다. 그 누구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치 퇴사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된다. 끈 떨어진 연이 된 것만 같은 기분.
그러나 이나가키 에미코는 끈 떨어진 연이 된 채로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부끄럼 많은 중년이긴 하지만, 그는 역시 21세기의 심지 굳은 여성. 2주 만에 시장 사람들과도 카페 사람들과도 숙소 주인인 니콜라와도 마음을 (조금) 나누는 데 성공했다. 자리에 앉기만 했는데도 늘 마시는 커피를 내오는 점원이 생겼는가 하면, “지난번 그 빵 맛있었지?” 하고 빵집 주인장이 알아봐주기도 한다. 일본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역시, 서로의 삶을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 역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나가키 에미코의 무작정 실천력에 슬며시 감동하게 되고 만다. 충실히 ‘평소의 생활’을 이어가려는 이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팔다리를 붕붕 흔들며 매일매일 허우적대는 그의 등을 받쳐주고 싶어진다. 나 또한 단순하고 굳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무미건조한 생활일지라도, 나는 나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다른 이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단골이 된다는 것은 가게에 대한 응원의 표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진지하게 가게를 살피고, 마음에 들면 열심히 다니고, 나름 느낌 좋게 행동하면서, 물건이 마음에 들면 분명하게 말로 전달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있을 자리와 주위 사람들, 친구들을 조금씩 넓히며 살아왔다. 그런 삶의 태도가 어쩌면 어디에서든 통하지 않을까 싶어, 두근두근 이 머나먼 리옹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본문에서
“아무도 아니지만, 나인.”
“쓸쓸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계획 없이 떠난 여행길에서 얻은 인생의 비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한다. 그 카페의 단골이 되어 가게를 응원한다. 장은 시장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날그날 보고, 냉장고는 사용하지 않으며, 전기는 최소한으로 아끼고, 밥은 직접 해 먹는다. 이 무미건조한 일을 굳이 프랑스 리옹까지 가서 반복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이나가키 에미코’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니지만,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낯선 이국의 사람들과 아주 잠깐이지만 이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나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앞으로의 나의 삶에 의미를 세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 근처에 이런 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딱히 목적도 없이 매일 아침 200엔의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만으로도 따스하게 환영받을 곳이 있다면, 분명 인생의 고독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아아, 여기 오는 노인들은 정말 행복하구나. 저 친절한 갸르송 한 사람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있을 자리’가 생긴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깊은 감명의 순간이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서로의 일상을, 서로의 생활을, 서로의 삶을 조금씩 지탱하면서, 사회 속에서 살아나가고 있다. 나는 사회 속에 있는 만인의 도움이 있기에, 비로소 나로 존재한다. 쓸쓸하지만, 쓸쓸하지 않다. 그것이 계획 없이 떠난 여행길에서 이나가키 에미코가 확인한 인생의 비밀이다.
역시 인생에는 여행이 필요하다. 일상이 필요하다.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 여행의 시간이 어서 돌아오기를. 우리의 풍요로웠던 일상이 회복되기를. 우리의 삶이, 모두와 더불어 이어질 수 있기를.